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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톡톡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온 국민은 작금의 나라일로 영화 ‘Tale of Tales’ (이야기속의 이야기)처럼 온갖 설과 ‘카더라’ 가 난무하는 한 해를 넘기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야기 속에 우리는 한 사람이 극도로 궁금해진다. 대체 어떻게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그토록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추론을 하다보면, 어떤 볼모(약점) 이 있지 않고서야 하는 결론도 나온다. 하지만, 약점이라고 하기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함을 느낀다. 그것이 감정이든, 존재자체든, 물질이든, 영적이든 분명히 한계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기에 이 모든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스치고 느끼고 교제하고 급기야 그들을 내 삶에 초대하고 나역시 그들 삶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그들에게 나는 무엇이 되려는지, 그들은 나의 무엇인지 객관성을 가지고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흔히들 마음은 마음가는대로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일까? 세상에 조건 없이 주어진 것이 있나 싶다. 심지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사하고자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는데, 감히 신도 아닌 인간이 아무 조건이 없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에 원론적인 생각들을 가끔씩 들추어 보곤 한다.


나라를 이토록 시끄럽게 하는 그들의 조건들은 얼마나 견고한 약속이고 믿음인지, 숭배에 가까운 신적존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굳게 걸어잠근 진실의 문, 자발적 복종이 부른 참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에 대한 탐구심이 생긴다. 그들도 한 때는 서로에게 온기를 주는 사람이었을 테니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하는 부분이 그저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누군가가 오랜 세월동안 길들여 놓은 그의 왕국을 우리는 2016년 연말에 목도(目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라고 찰리 채플린이 명언을 남겼다.


비극을 향한 인간들의 눈물 나는 희극적 몸부림을 온 세상이 함께 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망한 현실인가!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영화를 능가하는 형국이다. 이런 시국에도 나는 과연 누군가를 향해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 인간의 관계는 큰 풍파를 겪고 나면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된다.


경계하고 움켜쥐고, 의심하고, 확인하려 든다. 불신만 넘쳐나 진정성을 전하려 해도 힘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관계 속에 놓여 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번 더 숙고하고 살아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매일 같은 길을 지나다니고, 비슷한 풍경을 만나고, 편안함과 익숙함에 길들여져 있던 관성적인 삶이 부른 나태함의 결과로 요사이 종전보다 더 자주 나를 돌아보게 된다. 강바닥의 돌이 구르면서 바닥을 깊이 훑어 내린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있다.


나는 다리위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편한가? 흘러 내려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편한가? 이런 무심한 생각을 하면서 문득 영화에 나오는 잔인한 장면과 충격적인 장면들이 인간이라는 생물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무심한 생각이 스쳐간다.


국소적으로는 새로운 하나의 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거대한 우주라는 닫힌계에 생존하는 우리에게는 확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것이 파괴가 되던 창조가 되던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확률의 역류현상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는...그것은 무척이나 두렵고 무섭지만, 지극히도 사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살면서 결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많을 것들은 결국은 그 과정의 끝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 진다. 그래서 지금 현재 용광로 같은 뜨거움 속에 조바심 나서 유빙이 떠도는 바다에 몸을 식혀야 싶지 않을까 하는 절박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흘려보내기로 한다.


힘이 모자라 강바닥의 마음에 드는 돌을 큰 대양으로 가지고 가지못한다 하더라도 총총히 걸어간다. 그 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바다에 도착해서 할 일이다. 그런 연유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든 관계이든 참으로 가볍게 나풀거렸으나 참으로 진득하고 지난하며 그러나 즐거운 존재들이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강바닥에 가라앉은 것들을 막대기로 휘저어보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들은 때론 그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온 강물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관용의 한계... 내가 준 상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쉬이 흘러가지 않고 강바닥에 가라않았다간 때때로 강물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무심히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 마저 불편하게 한다.


여고시절 작문시간에 자유로운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마음에 관하여’ 선생님은 나더러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이므로 재고하기를 권하셨고, 나는 즉각 다른 주제를 찾아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직장동료에게‘나 역시 마음이 아팠어.’하고 말하는 나 자신과 일별하였다.


그 말을 하고는 하루 종일 젖은 양말을 신은 기분이었는데, 왜냐면 ‘마음’이라는 단어를 내가 너무 분별없이 사용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건데, 마음에 대한 분별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어쩌면 나는‘마음’을 하나의 관념에서가 아니라, 실체하는 상식 같은 것으로 암암리에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다시 생각하기시작했다. 직장동료는‘나 역시 마음이 아팠어.’에서 ‘마음’을 서로 통했다고 받아들였을까? 그렇다면 자유로운 주제에서‘자유’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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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키 사토시의<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한 장면


일편, 미키 사토시의<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스파이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주인공은 그녀가 스파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때문에 그녀가 심야도로를 규정 속도를 지키며 운전하고 있을 때 경찰 오토바이가 추적해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간에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키면서 달리는 걸 보니 당신 혹시 잘 못한거 있나요?” 이후, 그녀는 과속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다시 오토바이, “당신은 규정 속도를 위반 했습니다
” 라고 말한다. 대체,‘평범‘이란 무엇일까? 믿음 없는 믿음, 생각 없는 생각,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건 생각의 일부이면서, 마음의 허전함. 그건 마음이 곧 아무것도 아니되, ’것’이기는 하다는 걸 가리킨다.


영화<네 멋대로 해라!>를 보고 소리쳐 외치던 내 청춘이 어느새 “네 멋대로 하지마라!, 그래선 안돼!” 하고 마음속 깊이 되 내이고 있는 걸, 어떻게 부정하지...할 말은 많으나,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듯 매일매일 스치는 의미 없던 풍광들이 때론 눈물나게 고마울 때가 있다. 2016, So Happy Christmas!!!



이경섭 객원기자

[20161223일 제8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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